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예고편이 뜨자마자 원작 소설을 후다닥 완독했습니다. 그리고 "개봉이 내년이라고?"라는 황당함을 1년 내내 안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기다린 영화가 실망스러울까 봐 긴장도 됐는데, 지금까지 본 우주 SF 영화 중 가장 재밌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인터스텔라가 '경이로운' 영화라면, 이건 '재미있는' 영화입니다. 둘 다 잡은 게 아니라 방향 자체가 다릅니다.
원작 소설과 영화, 뭐가 달라졌나
앤디 위어의 원작 소설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제가 작년에 읽은 SF 소설 중 단연 최고였습니다. 엔딩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고, 다 읽고 나서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오히려 걱정이 컸습니다. 원작을 너무 재밌게 읽은 독자일수록 영화에 실망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원작의 핵심 구조는 서바이벌 퍼즐(survival puzzle)에 가깝습니다. 쉽게 말해 주인공이 모든 상황을 과학적 추론으로 분석하고 풀어가는 방식인데, 전체 분량의 70%가량이 그레이스의 머릿속 계산과 추론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첫 장면에서 기억을 잃은 채 깨어난 그레이스가 "자신이 영어를 쓰고 수학 개념을 인지한다. 따라서 과학자일 가능성이 높다"라고 분석하는 장면이 그 대표적인 예죠.
영화는 이 구조를 과감하게 바꿉니다. 같은 장면에서 라이언 고슬링은 허우적거리다가 그냥 이렇게 말합니다. "나 똑똑한 사람이었어." 이 한 줄이 각색의 방향을 전부 설명합니다. 《마션》 각본을 쓴 드류 고다드가 원작의 과학 추론 비중을 줄이는 대신, 그레이스와 외계 생물체 로키의 버디 무비(buddy movie) 구조를 영화의 중심에 꽂아 넣은 겁니다. 버디 무비란 성격이나 배경이 다른 두 캐릭터가 함께 문제를 해결하며 유대를 쌓는 장르 공식을 말합니다.
내용을 알고 봐도 충분히 재밌습니다. 저도 원작 독자로서 스토리를 이미 알고 극장에 갔는데, 전혀 다른 경험이었습니다. 영화에는 소설에서 생략된 부분도 많으니, 보고 난 뒤 소설까지 챙겨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 원작: 과학적 추론 중심, 그레이스의 내면 독백이 서사를 이끌어 감
- 영화: 버디 무비 구조 강화, 라이언 고슬링과 로키의 관계가 핵심
- 공통점: 과학으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해결한다는 앤디 위어 특유의 서사 DNA
로키라는 캐릭터가 왜 이렇게 대단한가
저는 돌멩이를 보고 울었습니다. 처음엔 스스로도 황당했습니다. 눈도 없고 얼굴도 없는 거미 형태의 외계 생물체인데, 어느 순간부터 그 캐릭터가 너무 좋아서 영화가 끝나지 않았으면 했습니다. 영화가 끝나지 않았으면 했던 경험이 제 기억에는 처음이었습니다.
로키 구현 방식에 대해 "CGI로 만들면 되지 않냐"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애니메트로닉스(animatronics) 선택이 결정적이었다고 봅니다. 애니메트로닉스란 실제로 기계를 조작해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특수 효과 기법으로, 배우가 세트에서 실제 물체와 반응하며 연기할 수 있게 해줍니다. CG로 후보정하는 방식과 달리 라이언 고슬링이 그 자리에서 실제로 반응한 겁니다. 이 차이가 연기의 온도를 완전히 바꿉니다.
로키에게 주어진 과제는 솔직히 무리한 수준입니다. 얼굴도 눈도 없는데 공감이 가야 하고, 감정적이면서도 유머가 있어야 하고, 신비롭고 용감하면서도 귀여워야 합니다. 그레이스의 고독까지 치유해줘야 하고요. 어릴 때부터 외계인을 '싸우거나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그리는 우주 SF를 주로 봐왔던 저로서는, 우정과 협력의 대상으로 그려지는 외계인 캐릭터가 이렇게까지 설득력 있게 구현된 걸 처음 봤습니다.
이 영화가 "2026년판 ET"라는 표현이 제게 가장 와닿는 비유입니다. 스필버그의 엠블린 영화들이 주던,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경의감과 동심 같은 감정이 로키를 통해 되살아납니다. 만약 지금의 스필버그가 처음 영화를 시작한 젊은 감독이었다면 이런 영화를 만들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로키 굿즈가 나온다면 저는 반드시 살 것 같습니다.
아이맥스로 봐야 하는 이유, 그리고 이 영화의 전망
런닝타임이 2시간 40분이 넘습니다. "그 시간을 버틸 수 있을까"라고 걱정했는데, 제 경험상 이건 좀 달랐습니다. 지루한 장면이 단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루즈하게 늘어질 수 있는 장면은 압도적인 영상미로 눈을 붙잡고, 그게 지나가면 그레이스와 로키의 티키타카가 웃겨주고, 그 장면이 너무 가벼워질 즈음 지구 상황과 헤일메리 프로젝트의 배경이 플래시백으로 들어오며 긴장을 다시 끌어올립니다. 우리나라 영화에서 자주 보이는 신파적 감정 과잉과는 확실히 결이 다릅니다.
IMAX(아이맥스)란 일반 스크린보다 훨씬 크고 높은 화면비를 사용하는 상영 포맷으로, 특히 상하 시야각이 넓어져 우주 장면의 스케일감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 영화는 전체 러닝타임의 약 3분의 2가 아이맥스 화면비로 촬영됐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작품들보다도 아이맥스 비율이 높은 수준입니다. 우주 유영 장면에서 행성을 바라볼 때, 헤일메리 우주선 내부의 빛과 세트 미술 디테일을 볼 때—저는 조명 트릭에 완전히 빠져서 봤습니다. SF 영화 특유의 차갑고 폐쇄적인 우주의 통념을 색감과 빛깔로 바꿔버리는 방식이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
제작비는 2억 4,800만 달러 규모의 대형 프로젝트입니다. 아마존 MGM이 배급을 맡았지만 대형 블록버스터 흥행 경험이 많지 않다는 우려도 있었고, 라이언 고슬링은 직전 대형 영화 《스턴트맨》에서 흥행 성적이 기대에 못 미쳤다는 평가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결과는 이 영화를 직접 확인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각색을 맡은 드류 고다드는 《마션》 각본으로, 연출의 필 로드와 크리스 밀러는 스파이더버스 시리즈(출처: IMDb, Spider-Man: Into the Spider-Verse)로 각자의 장기를 이미 증명한 팀입니다. 세 사람이 붙어서 각자가 가장 잘하는 것을 했습니다.
"아이맥스는 굳이 안 가도 되지 않냐"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신데, 제 판단으로는 이 영화에 한해서는 아이맥스가 필수입니다. 아카데미 시각효과상과 각색상 후보로도 충분히 언급될 수 있는 수준이라고 봅니다(출처: Academy of Motion Picture Arts and Sciences). 연말까지도 올해 최고의 영화 자리가 흔들리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원작 소설 안 읽어도 영화 재밌게 볼 수 있나요?
A. 저는 원작을 읽고 갔는데, 소설을 모르는 분들이 더 순수하게 즐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영화 자체로 서사가 완결되고, 사전 정보 없이 기대감만 가지고 들어가는 쪽이 감정적으로 더 폭발적일 수 있습니다. 보고 나서 소설을 읽으면 영화에서 생략된 디테일을 채우는 재미가 있습니다.
Q. 외계인이 예고편에 이미 나오는데 스포 아닌가요?
A. 이 영화는 로키를 숨기는 것보다 보여주는 쪽이 마케팅적으로 맞다는 판단 하에 공개한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이 영화의 정체성은 우주 생존극이 아니라 인간과 외계인의 우정 드라마이기 때문에, 외계인이 나온다는 사실 자체는 스포라기보다 장르 안내에 가깝습니다. 《터미네이터 2》가 T800이 선역임을 알고 봐도 명작인 것처럼, 헤일메리도 미리 알고 말고가 중요한 영화가 아닙니다.
Q. 아이맥스 말고 일반 상영관은 어떤가요?
A. 일반 상영관도 충분히 재밌다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전체 런닝타임의 상당 부분이 아이맥스 화면비로 촬영된 영화라는 점을 감안하면 일반 상영에서는 화면 상하가 잘려서 보이게 됩니다. 제 판단으로는 이 영화의 시각적 경험이 스토리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가능하면 아이맥스 상영관을 적극 권합니다.
Q. 아이들이랑 같이 봐도 되나요?
A. 픽사나 디즈니 애니메이션으로 내도 될 정도의 이야기라는 평가가 있을 만큼, 우정과 협력을 중심으로 한 서사이기 때문에 가족 단위 관람에도 무리가 없습니다. 다만 런닝타임이 2시간 40분이 넘고, 과학적 설명이 꽤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어린 아이들에게는 다소 길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결론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한참을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아껴 먹고 싶어서 끝이 가까워질수록 싫었던 영화는 처음이었습니다. 인터스텔라가 경이로운 영화였다면,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그냥 재밌는 영화였습니다. 그런데 그 '재밌다'는 감각이 생각보다 훨씬 깊은 여운을 남겼습니다.
원작 소설을 읽은 분이든 아니든, 우주 SF를 좋아하든 아니든, 이 영화는 다양한 입구에서 받아줄 수 있는 작품입니다. 아이맥스로 먼저 보고, 여운이 남으면 소설로 이어가는 루트를 권합니다. 메이킹 필름도 꼭 챙겨보십시오. 세트와 퍼펫티어 작업 과정을 보면 로키에 대한 애정이 한층 더 깊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