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넷플릭스 공개 직후 한국·일본을 포함한 여러 국가에서 동시에 일일 TOP 10 영화 상위권에 오른 작품이 있습니다. 2023년작 일본 영화 <치히로상>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딱 하나의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 진짜로 단단한 건가, 아니면 그냥 텅 빈 채로 살아가는 건가."
전직 업소 여성이 도시락 가게 직원이 된 이유
영화의 설정 자체가 꽤 직접적입니다. 주인공 치히로는 소위 '마사지 업소', 즉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소에서 일했던 과거를 가지고 있고, 지금은 바닷가 마을의 작은 도시락 가게에서 일합니다. 사장은 굳이 과거를 밝힐 필요가 없다고 덮어주려 하지만 치히로는 담담합니다. 숨기지도, 굳이 꺼내지도 않습니다.
이런 설정이 한국 영화였다면 아마 '충격적 과거를 가진 여성의 사회 복귀기' 같은 무거운 서사로 흘렀을 겁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치히로의 과거는 그냥 치히로의 일부일 뿐이고, 영화는 그 사실을 별로 대단하게 다루지 않습니다. 그 무심함이 오히려 이상하게 편안합니다.
요즘 제가 한국 영화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겁니다. 한국 영화는 감성적인 소재를 유치함으로 치부하고 독한 서사만 남은 느낌이 있습니다. 반면 <치히로상> 같은 일본 영화는 '슈퍼 해피 포에버'나 '올 그린스' 같은 작품들처럼 잘 짜인 플롯보다 단편적인 장면들을 이어가며 감성적인 순간을 하나씩 던지는데, 그게 저한테는 훨씬 더 오래 남습니다.
내러티브 구조(narrative structure)라는 관점에서 보면, 쉽게 말해 이야기를 어떻게 쌓아 올리느냐의 방식인데, 이 영화는 기승전결 대신 에피소드 연결 방식을 택했습니다. 덕분에 전체 줄거리보다 장면 하나하나가 더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독특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치히로라는 캐릭터, 성인군자인가 텅 빈 사람인가
솔직히 이건 제가 영화를 보는 내내 계속 흔들렸던 부분입니다. 치히로는 모든 걸 긍정으로 소화합니다. 현장 인부들의 수준 낮은 농담도 웃어넘기고, 노숙자 할아버지에게 자신의 도시락을 아무렇지 않게 건네고, 컴파스로 팔을 찌른 꼬마아이에게도 화를 내지 않습니다. 이 정도면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사람, 진짜 성인군자 아닌가?"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그런데 반대로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너무 많은 상처를 받아서 오히려 굳은살로 덮여버린 사람이 아닐까. 진짜로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라, 아프다는 감각 자체가 무뎌진 채 관성적으로 예전의 자신을 연기하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 하고요. 어린 시절 캄캄한 밤 혼자 도시락을 먹던 치히로에게 이유를 묻지 않고 곁에 앉아준 어른 '치히로'를 만나고, 그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삼아 살아가는 장면에서 그런 의심이 더 짙어졌습니다.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 즉 영화 안에서 주인공이 내면적으로 변화하는 궤적을 말하는데, 이 영화에서 치히로의 아크는 놀랍도록 조용합니다. 극적인 변화도, 눈물을 쏟는 씬도 없습니다. 그런데 배우 아리무라 카스미는 그 조용한 아크를 표정 하나로 다 담아냅니다. 제가 직접 봤을 때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이렇게 연기를 잘하는 줄 몰랐으니까요.
이 캐릭터의 힘은 캐릭터 공감 지수(character empathy index)라고 할 수 있는, 보는 사람이 얼마나 그 인물에게 자신을 투영하느냐의 문제에서 나옵니다. 치히로는 완벽하지 않지만 비난받지 않고, 강하지 않지만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 균형이 묘하게 응원하게 만들고, 저는 영화가 끝난 뒤에도 "이 사람이 진심으로 웃으며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한참 남았습니다.
- 노숙자 할아버지, 여고생 쿠니코, 꼬마 마코토 — 소외된 이들에게 이유 없이 곁을 내어주는 치히로
- 과거를 숨기지 않되 굳이 내세우지도 않는 담담한 자기 수용
- 어린 시절 받은 '무심한 온기'를 어른이 되어 타인에게 그대로 돌려주는 서사
- 아리무라 카스미의 절제된 연기 — 과장 없이 외로움과 따뜻함을 동시에 전달
이 영화가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이유
2023년작임에도 일본 현지에서는 아직도 SNS에서 "인생 영화"로 자주 언급된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저는 이 한 줄에서 찾았습니다. "힘내지 않아도, 무리하지 않아도 괜찮아." 솔직히 그게 가장 필요한 위로일 텐데, 말이죠.
심리학에서는 이를 '자기 자비(self-compassion)'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자기 자비란 자신의 실패나 고통을 지나치게 자책하지 않고 따뜻하게 바라보는 능력을 말합니다. 출처: Self-Compassion 연구소(Kristin Neff)에 따르면, 자기 자비 수준이 높은 사람일수록 심리적 회복탄력성이 유의미하게 높게 나타났습니다. 치히로가 가진 그 무심한 다정함은 사실 자기 자비를 타인에게까지 확장한 형태와 닮아 있습니다.
물론 영화의 설정이 100% 현실적이지는 않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현실에서 치히로처럼 행동하면 그냥 이용당하기 십상이니까요. 그럼에도 이 영화가 힐링이 되는 건, 현실에서 불가능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간절하게 바라게 되는 무언가를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쿠니코가 치히로를 몰래 사진으로 찍는 장면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 치히로가 어른 치히로를 동경했듯, 쿠니코는 지금 치히로를 동경합니다. 이 미러링 구조는 관객에게 "언젠가 나도 이 시련을 지나고 나면 저렇게 살 수 있지 않을까"라는 조용한 희망을 심어줍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원했던 것도 그것이었습니다. 지금 제 시련 끝에 평안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 말이죠.
미러링 구조(mirroring structure)란 영화 안에서 한 인물의 과거와 현재, 또는 두 인물의 관계가 서로를 반영하도록 설계된 서사 기법입니다. 이 기법이 효과적으로 작동할 때 관객은 자신의 이야기를 화면 속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출처: Netflix — 치히로상 작품 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듯, 이 작품은 현재도 넷플릭스에서 시청 가능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치히로상 어디서 볼 수 있나요?
A. 넷플릭스에서 시청 가능합니다. 2023년 공개 이후 지금도 서비스 중이며, 한국어 자막을 지원합니다. 별도의 추가 결제 없이 넷플릭스 구독만 있으면 바로 볼 수 있습니다.
Q. 치히로상, 내용이 불편하지 않나요? 업소 소재가 걸려서요.
A. 저도 처음엔 같은 걱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그 소재를 자극적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치히로의 과거는 그냥 그녀의 일부로 존재할 뿐이고, 영화는 그것을 드라마틱하게 소비하지 않습니다. 불편함보다 오히려 담담함이 인상적이었습니다.
Q. 아리무라 카스미가 주연인데 연기가 정말 그렇게 좋은가요?
A.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저는 이전까지 아리무라 카스미를 그냥 예쁜 배우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 영화에서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표정을 거의 쓰지 않는데도 치히로가 느끼는 외로움과 온기가 동시에 전달되는 장면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연기 때문에 영화를 보는 분들도 있을 정도입니다.
Q. 스토리가 산만하다는 말이 있던데, 줄거리 없이 장면만 이어지는 영화인가요?
A. 솔직히 말하면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기승전결이 뚜렷한 걸 좋아하는 분들에게는 답답할 수 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줄거리보다 장면과 감정이 먼저 떠오르는 구조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걸 단점으로 볼지, 특징으로 볼지는 취향에 따라 다를 것 같습니다.
결론
치히로상은 "다 봤는데 줄거리는 기억 안 나고, 배우의 눈빛만 기억에 남는" 영화입니다. 제 경우에도 딱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게 이 영화의 결함이 아니라 의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나중에야 했습니다.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게 아니라 감각적으로 스며드는 영화니까요.
치히로는 마지막에 마을을 떠납니다. "잘 살았답니다"는 식의 후련한 마무리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결말을 치유의 완성이 아니라 치유의 과정으로 읽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이유를 묻지 않고 곁이 되어줄 수 있는 어른이 된 치히로가, 이제는 자기 자신의 마음도 그렇게 안아주러 떠난 것이라면, 언젠가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남의 눈치를 보느라 자신을 잃어버린 느낌이 드는 분들께, 억지로 힘을 내야 한다는 압박에 지친 분들께 이 영화를 권합니다. 화면 속 치히로처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사는 법을 배우고 싶어지는 경험이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