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공포 영화 보다가 오히려 "저 회사 안전 관리 어떻게 하는 거야?"가 먼저 튀어나올 줄은 몰랐거든요. 2020년 공개된 미국 호러 앤솔로지 시리즈 50 States of Fright의 아이오와 편 〈Almost There〉, 24분짜리 단편인데 고소공포증 테마에 트라우마 극복 서사를 얹은 구성이 제법 단단합니다. 다만 칭찬만 하기엔 좀 걸리는 부분이 있어서, 직접 본 입장에서 솔직하게 적어봤습니다.
고소공포증 영화라더니, 진짜 무서운 건 따로 있었다
일반적으로 고소공포증 테마 호러라고 하면 주인공이 높은 곳에서 벌벌 떠는 장면을 반복해서 보여주는 방식을 떠올리기 마련인데, 제 경험상 이 작품은 조금 달랐습니다. 공포의 원천이 단순히 높이에서 오는 게 아니라, 주인공 해나가 어린 시절 겪은 사건에서 비롯된 트라우마(trauma)와 맞닿아 있거든요. 여기서 트라우마란 극심한 심리적 충격 이후 지속적으로 그 사건이 현재 삶에 침투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단순한 무서움이 아니라 과거가 현재를 덮쳐오는 느낌이라고 보면 됩니다.
1999년, 아이오와. 현대 문명을 거부하는 종교 공동체 아미쉬(Amish) 출신의 엄마가 어린 세 딸을 데리고 기차가 달려오는 철교 위로 걸어 들어갑니다. 이 장면 하나로 영화 전체의 무게가 결정됩니다. 그로부터 20년 뒤 유일한 생존자 해나는 전력 유지보수팀에서 일하고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엄마가 평생 거부했던 현대 문명의 인프라를 손으로 고치며 먹고사는 직업을 갖게 된 거죠. 제가 이 설정을 봤을 때 "아, 이건 단순한 공포물이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보통 고소공포증 영화라고 하면 관객이 주인공의 공포에 감정이입하는 구조인데, 저는 오히려 해나의 상황 자체가 더 무서웠습니다. 어릴 때 가족이 다리에서 몰살당하는 걸 목격했는데 평생 정신과 치료 한번 제대로 못 받았을 가능성이 높거든요. 그 상태로 200피트짜리 풍력터빈에 올라가야 한다는 설정은, 솔직히 공포보다 안쓰러움이 먼저였습니다.
풍력터빈 위에서 벌어지는 일들, 현실적으로 따져보면
제가 직접 써봤는데— 아니, 올라가 본 건 아니고요. 실제로 차 타고 지나다 보면 멈춰 있는 풍력터빈이 꽤 자주 눈에 띕니다. 친환경 에너지라는 이미지와 달리, 고장 잦고 유지보수 비용도 만만치 않다는 게 현실이거든요. 영화 속 설정도 그래서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통신 두절, 블레이드 정렬 불량, 30분 뒤 강풍 예보. 세 가지 악조건이 동시에 터지는 상황인데, 이게 과장처럼 보여도 실제 풍력터빈 유지보수 현장에서 복합 결함이 동시 발생하는 사례는 드물지 않습니다.
블레이드 정렬 불량(blade misalignment)은 쉽게 말해 세 개의 날개 중 하나라도 각도가 틀어지면 강풍 시 터빈 전체가 통제 불능 상태로 회전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영화에서 블레이크가 "유튜브에서 터빈 파손 영상 본 적 있냐"라고 묻는 장면이 있는데, 실제로 이런 사고 영상이 존재합니다. 출처: 국제재생에너지기구(IRENA)에 따르면 풍력 에너지는 확장되고 있지만 운영 안전성과 유지보수 인력 문제는 지속적인 과제로 꼽힙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 눈에 걸린 게 하나 있습니다. 베테랑인 블레이크가 먼저 올라가다가 중간에 순서를 바꿔 해나를 선두로 세우는 장면. 저는 이 부분이 솔직히 개억지라고 느꼈습니다. 실제 고소 작업에서 표준 작업 절차(SOP, Standard Operating Procedure)를 지킨다면— 여기서 SOP란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단계별로 정해진 작업 순서와 안전 수칙을 말합니다— 숙련자가 선두를 포기하는 상황은 거의 발생하지 않거든요. 이 장면은 제가 보기엔 스토리 전개를 위한 억지 설정이었습니다.
- 통신 두절: 현장과 지상 간 교신 불가 상태로, 실제 고소 작업에서는 즉각 작업 중단 사유에 해당
- 블레이드 정렬 불량: 강풍 조건 하에서 터빈 파손 또는 낙하물 발생 가능성을 수반하는 중대 결함
- 기상 악화 예보: 영화 속 현장 책임자는 예보 40m/s 풍속을 예상, 이는 태풍에 준하는 수준
트라우마 극복 서사, 잘 됐나 못 됐나
공포 영화의 여주인공이 멍청한 선택을 반복해야 스토리가 굴러간다는 건 이제 거의 공식처럼 굳어진 클리셰인데요. 해나도 처음엔 그쪽으로 가는 것 같아서 답답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공포 영화 여주와 비교해보면 해나는 의외로 시원시원한 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기 담당 업무도 아닌 땜빵 호출에 끌려 나온 처지고, 어린 시절 그런 사건을 겪었으면 평생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를 달고 살아도 이상하지 않거든요. 여기서 PTSD란 생명을 위협하는 충격적 사건을 경험한 뒤 장기간 불안·회피·재경험 증상이 지속되는 정신건강 상태를 말합니다.
해나가 터빈을 오르며 보게 되는 엄마의 환영(hallucination). 처음엔 그냥 공포 연출용인 줄 알았는데, 마지막 장면에서 해석이 달라집니다. 환영 속 엄마가 "네가 해낸 거야"라는 뉘앙스의 말을 남기거든요. 저는 이 부분이 꽤 마음에 들었습니다. 트라우마의 근원이 된 인물이 오히려 극복의 계기로 재해석되는 구조인데, 24분짜리 단편에서 이걸 억지스럽지 않게 처리한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출처: 미국 국립정신건강연구소(NIMH)에 따르면 PTSD는 적절한 심리치료 없이 수십 년간 지속될 수 있으며, 회피 행동이 증상 고착화를 촉진합니다. 해나가 마지막에 평소라면 멀리 돌아갔을 밴 브리지(Van Bridge)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장면은 바로 이 회피 행동의 종료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연출이고요. 그게 영화의 진짜 마무리였다고 생각합니다.
아쉬운 점과 장편 가능성, 제 솔직한 판단
일반적으로 단편 호러 앤솔로지는 임팩트 하나만 남기면 성공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이 작품이 그 이상을 욕심낸다고 느꼈습니다. 고소공포증 스릴러와 심리 호러, 트라우마 드라마를 동시에 하려다 보니 각각이 충분히 깊어지지 못한 면이 있거든요. 특히 스토리의 인과관계가 좀 엉성합니다.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을 고소 작업에 투입하기 전에 심리 감정(psychological screening) 같은 절차가 있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고— 이는 작업자 본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료의 생명과도 직결되는 사안이거든요. 블레이크가 추락한 것도 따지고 보면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재의 밀도 자체는 높습니다. 아미쉬 공동체의 문명 거부, 풍력터빈 유지보수 현장, PTSD 회피와 직면. 이 세 가지를 하나의 선으로 꿰는 서사 구조는 단편이라서 오히려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편으로 만들면 각 요소에 충분한 호흡을 줄 수 있을 텐데, 제 경험상 이렇게 소재가 단단한 작품이 단편에 묶여 있으면 두고두고 아쉬운 법이거든요.
그리고 마지막에 블레이크가 해나에게 기념품이라며 건네는 장면, "위에서 풀 바(full bar) 잡혔어"라는 대사. 짧은 유머지만 이 한 줄이 긴장감을 풀어주는 역할을 제대로 해줬습니다. 공포 영화에서 후반부 긴장 해소 장면은 관객이 숨 돌릴 수 있게 해주는 완급 조절(pacing)의 핵심인데, 24분 안에서 이걸 놓치지 않은 점은 칭찬하고 싶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Almost There〉는 어디서 볼 수 있나요?
A. 원래 Quibi 플랫폼에서 2020년 공개됐던 작품입니다. Quibi 서비스 종료 이후 유통 경로가 바뀌었는데, 제가 찾아본 시점에선 일부 영상 플랫폼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 정확한 서비스 제공처는 직접 검색해보시는 편이 빠릅니다.
Q. 아미쉬(Amish)가 왜 현대 문명을 거부하는 건가요?
A. 아미쉬는 17세기 유럽에서 시작된 기독교 재세례파 공동체로, 현대 기술이 공동체 결속과 신앙을 해친다는 신념에 따라 전기·자동차·인터넷 사용을 제한합니다. 일반적으로 "종교적 강요"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아미쉬 내부에서는 자발적인 선택의 문제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화에서 엄마의 극단적 선택이 아미쉬 전체를 대표하는 것은 아닙니다.
Q. 풍력터빈 옆에 살면 소음이 진짜 심한가요?
A. 제 경험상 고속도로 옆을 지나치다 보면 멈춰 있는 터빈도 꽤 있고, 가동 중인 터빈에서는 저주파 소음(low-frequency noise)이 상당합니다. 저주파 소음이란 20~200Hz 대역의 소리로, 귀에 잘 들리지 않지만 신체와 수면에 지속적인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인근 주민과 야생동물에게 스트레스 요인이 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는 것도 사실이어서, 친환경 에너지라는 이미지만으로 판단하기엔 복잡한 면이 있습니다.
Q. 50 States of Fright 시리즈 다른 에피소드도 볼 만한가요?
A. 각 에피소드가 미국의 각 주(州) 전설을 다루는 앤솔로지 구조라 편차가 있습니다. 〈Almost There〉는 그 중에서도 심리적 층위가 있는 편에 속한다고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단편 특유의 짧고 강한 연출을 선호한다면 다른 에피소드도 도전해볼 만합니다.
결론
〈Almost There〉, 정리하면 소재는 A인데 실행은 B+ 정도인 작품입니다. 고소공포증이 테마라기보다는 트라우마 직면 드라마에 스릴러 외피를 씌운 작품에 가깝고, 24분이라는 시간이 오히려 이 풍부한 소재를 압축해버린 면이 있습니다. 스토리 개연성 면에서 걸리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해나라는 캐릭터와 마지막 밴 브리지 장면만큼은 꽤 오래 남을 것 같습니다.
공포 영화를 즐기는 편이라면 24분 투자는 충분히 가치 있고, 단편 호러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궁금하다면 볼 만한 기준선이 되는 작품입니다. 장편화된다면 그때 다시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