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단편 공포물이라고 가볍게 틀었다가 손에 땀을 쥐었거든요. 《50 States of Fright》의 에피소드 '올모스트 데어(Almost There, 2020)'는 풍력터빈 위에서 벌어지는 고소공포증 체험에, 어릴 때 다리 위에서 가족을 잃은 트라우마까지 얹어버린 작품입니다. 짧은 러닝타임이 아쉬울 만큼 소재 자체가 워낙 강렬했습니다.
고소공포증인 줄 알았더니 — 이건 후임 공포증이었습니다
보다가 제가 먼저 터진 웃음이 있는데, 바로 블레이크 때문이었습니다. 현장 베테랑이 사다리를 오르다가 먼저 추락하고, 경험도 없는 해나 혼자 꼭대기까지 올라가야 하는 상황. 고소공포증 영화라고 홍보하는데 제가 느낀 건 오히려 "저 선배 참 불쌍하다"는 감정이었습니다.
이 에피소드에서 핵심이 되는 설정이 바로 풍력터빈(Wind Turbine)입니다. 풍력터빈이란 바람의 운동에너지를 날개(블레이드)로 포착해 전기로 변환하는 발전 설비인데, 실제 대형 육상 터빈의 타워 높이는 80~120미터에 달합니다. 작품 속 해나가 올라가는 높이 200피트(약 61미터)는 오히려 현실보다 낮게 잡은 수치입니다. 제가 고속도로 옆에서 저 거대한 구조물들을 올려다볼 때마다 느끼는 아찔함을, 영상은 꽤 정직하게 담아냈더군요.
그런데 정작 작위적이었던 건 순서 교대 장면이었습니다. 선두에 서던 베테랑 블레이크가 중간에 갑자기 뒤로 빠지고 경험 없는 해나가 앞장서는 흐름인데, 제 경험상 현장 작업에서 저런 순서 바꿈은 안전 매뉴얼 위반입니다. 미국 산업안전보건청(OSHA)은 고소작업 시 선임자가 후행하도록 명시하고 있어서, 극적 긴장을 위한 설정이라는 게 너무 티가 났습니다(출처: OSHA Fall Protection Standards).
- 터빈 타워 높이: 실제 대형 육상 터빈 기준 80~120m, 작품 설정은 약 61m(200ft)
- 블레이드 정렬 불량(Blade Misalignment): 날개 각도가 틀어지면 강풍 시 터빈 전체가 불균형 진동을 일으킴
- 통신 두절 + 기상 악화 + 블레이드 이상 = 극 중 묘사된 '삼중 위기' 구조
풍력터빈, 진짜로 친환경적인 건가요?
사실 이 작품을 보다가 터빈 자체에 대한 의문이 다시 올라왔습니다. 제가 지방 국도를 달릴 때마다 고장 나서 멈춰 있는 터빈을 심심찮게 봤거든요. 돌아가는 것보다 서 있는 게 더 많을 때도 있었습니다. 친환경이라는 말이 선뜻 믿기지 않는 장면이었습니다.
풍력발전의 탄소 발자국(Carbon Footprint)은 제조·운송·설치·폐기까지 전 주기를 합산했을 때 화석연료 대비 현저히 낮은 건 사실입니다. 탄소 발자국이란 어떤 제품이나 활동이 생애 전체에 걸쳐 배출하는 이산화탄소 환산량을 의미합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육상 풍력의 전 주기 탄소 배출량은 킬로와트시(kWh) 당 약 7~15g으로, 석탄 발전의 820g 대비 98% 이상 낮습니다(출처: IEA, Net Zero by 2050).
하지만 저음 소음 문제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저주파 소음(Low-frequency Noise)이란 인간의 가청 범위 하한선인 20Hz 안팎의 소리로, 귀에 잘 들리지 않아도 체내에서 지속적인 불쾌감과 수면 방해를 유발할 수 있습니다. 터빈 근처에서 발생하는 이 쿵덕거리는 진동은 인근 주민이나 야생동물에게 실질적인 스트레스 요인이 됩니다. 제 생각엔 '친환경'이라는 단어 하나로 퉁치기엔 해결 못 한 숙제가 분명히 있어 보입니다.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법 — 해나가 옳았을까요?
1999년, 아이오와의 한 소녀가 엄마의 손에 이끌려 기차가 달려오는 다리 위에 선 장면. 그 장면이 가장 오래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어릴 때 그런 일을 겪으면 평생 정신과 신세를 져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해나는 전력회사 현장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이 설정이 처음엔 너무 가볍다고 느꼈습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란 생명을 위협하는 사건을 경험한 뒤 반복적인 침습적 기억, 회피 행동, 과각성 상태가 지속되는 정신 질환입니다. 해나가 높은 곳에서 환청과 환영을 경험하는 장면은 PTSD의 플래시백(Flashback) 증상을 꽤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플래시백이란 과거의 충격적 사건이 마치 지금 일어나는 것처럼 생생하게 재경험되는 증상입니다.
그런데 제 눈엔 엄마의 환영이 꼭 해나를 괴롭히려는 것만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블레이크가 "네가 해낸 거야"라고 말하는 순간, 그 환영도 멈추거든요. 어쩌면 엄마는 딸이 그 공포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을 상징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리 앞에서 멈추지 않고 통과하는 마지막 장면도 그래서 좋았습니다. 도망치던 사람이 직면을 선택하는 순간, 짧은 단편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마무리였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올모스트 데어(Almost There)는 어디서 볼 수 있나요?
A. 《50 States of Fright》 시리즈의 에피소드로, 2020년 Quibi 플랫폼에서 공개되었습니다. 현재 스트리밍 서비스 이전 여부는 각 플랫폼에서 직접 확인하시는 게 정확합니다. 제가 접한 건 요약 영상 형태였는데,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Q. 실제 풍력터빈 정비 작업은 얼마나 위험한가요?
A. 상당히 위험한 직종으로 분류됩니다. OSHA 기준에서 고소작업(고도 1.8m 이상)은 별도 안전 규정이 적용되며, 풍력터빈 기술자는 미국에서 산업재해 위험 직종 상위권에 속합니다. 제 눈엔 영화 속 블레이크가 베테랑이라면서 정작 하네스(Harness, 추락 방지용 안전 장구)를 제대로 점검하지 않은 장면이 가장 비현실적으로 보였습니다.
Q. 아미쉬(Amish) 공동체가 실제로 저런 일을 하나요?
A. 아미쉬란 전기·자동차 등 현대 기술 문명을 거부하고 공동체 중심의 전통 생활을 유지하는 기독교 계열 종교 집단입니다. 실제로 미국 아이오와, 펜실베이니아 등지에 거주합니다. 작품 속 묘사처럼 극단적인 행동을 보이는 사례는 극히 이례적이며, 일반적인 아미쉬 공동체의 모습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Q. 고소공포증과 PTSD는 치료가 가능한가요?
A. 네, 둘 다 치료 효과가 검증된 방법들이 있습니다. 고소공포증은 노출 치료(Exposure Therapy)가 대표적이고, PTSD는 인지처리치료(CPT)나 EMDR(안구운동 민감소실 및 재처리 요법) 등이 효과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해나가 영화 마지막에 다리를 직접 건너는 장면은 사실 노출 치료의 원리와 꽤 닮아 있습니다.
결론
정리하면, '올모스트 데어'는 설정의 개연성 문제를 짚고 싶어도 소재 자체의 힘이 그걸 어느 정도 눌러버리는 작품이었습니다. 고소공포증이라는 물리적 공포와 PTSD라는 심리적 공포를 동시에 다루면서, 짧은 러닝타임 안에 트라우마 극복 서사까지 끼워 넣은 건 솔직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다만 채용 단계에서 정신 건강 감정도 없이 트라우마 당사자를 고위험 현장에 투입하는 회사 설정, 베테랑이 먼저 떨어지는 억지 전개는 제가 보기에 분명한 약점이었습니다. 장편으로 제작된다면 이 부분들을 좀 더 촘촘히 다듬어 주길 바라고 싶습니다. 소재가 아깝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