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로버트 패틴슨이 나온다길래 반신반의하며 틀었다가, 화면에서 눈을 못 뗐습니다. 트와일라잇 이미지가 너무 강하게 박혀 있어서인지, 이 정도로 비열하고 추잡한 역할을 이렇게 완벽하게 소화할 줄은 몰랐습니다. 넷플릭스 영화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보고 나서 한참 기분이 찝찝했는데 그게 오히려 이 영화가 잘 만들어졌다는 증거였습니다.
캐스팅 — 이 라인업이 한 영화에 모였다는 게 아직도 신기합니다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The Devil All the Time, 2020)는 미국 오하이오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전쟁 트라우마를 안고 돌아온 한 남자의 가족사가 여러 세대에 걸쳐 폭력과 광기로 얽히는 구조를 가진 네오 누아르 스릴러입니다. 여기서 네오 누아르(Neo-noir)란 1940~50년대 고전 누아르 영화의 어두운 세계관과 도덕적 모호성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장르를 뜻합니다. 선악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고, 악의 없이 시작한 행동이 파국으로 흘러가는 방식이 이 장르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가장 큰 화제는 스토리보다 출연진이었습니다. 주인공 아비 역에 톰 홀랜드, 부패한 보안관 보데 역에 세바스찬 스탠, 타락한 목사 티가딘 역에 로버트 패틴슨, 그리고 빌 스카스가드까지. 제가 이 라인업을 처음 봤을 때 진심으로 '이게 실화야?' 싶었습니다. 지금 다시 이 조합을 구성하려 하면 아마 불가능할 겁니다.
더 놀라운 건 이 유명 배우들이 허탈할 정도로 짧게 소비된다는 점입니다. 빌 스카스가드가 그 대표적인 예인데, 마치 일회용처럼 처리됩니다. 그런데도 배우들이 이 각본에 응해줬다는 것 자체가 대단합니다. 각자가 이 영화의 메시지를 신뢰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제 경험상 이런 고밀도 앙상블 캐스팅은 보통 블록버스터 액션이나 슈퍼히어로물에 몰리는데, 이렇게 음침하고 느린 스릴러에 모인 것은 이례적입니다.
- 톰 홀랜드 — 주인공 아비 역. 스파이더맨 이미지를 완전히 걷어낸 생존형 연기
- 로버트 패틴슨 — 타락한 목사 티가딘 역. 비열하고 위선적인 인물을 능청스럽게 소화
- 세바스찬 스탠 — 부패 보안관 보데 역. 권력으로 진실을 덮는 인물
- 빌 스카스가드 — 전쟁 트라우마를 가진 아비의 아버지 윌러드 역
- 엘리자 스캔런 — 리노라 역. 「작은 아씨들」에 이어 또 한 번 존재감을 증명
연기력 — 로버트 패틴슨, 이 사람이 이렇게 잘하는 줄 몰랐습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가장 충격받은 건 로버트 패틴슨이었습니다. 트와일라잇 시리즈로 '곱상한 미남 이미지'가 너무 강하게 박혀서인지, 이후 행보를 잘 안 챙겨봤는데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완전히 인식이 바뀌었습니다. 타락한 목사 티가딘은 외모는 그럴듯하게 유지하면서 내면은 완전히 썩어 있는 인물인데, 패틴슨은 그 이중성을 지나치게 밀어붙이지 않고 오히려 능청스럽게 연기해서 더 소름 돋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패틴슨은 트와일라잇 이후로 의도적으로 야비하고 불쾌한 역할을 찾아다니는 것 같습니다. 이 작품 이후 「더 배트맨」에서 배트맨을 맡긴 했지만, 그 안에서도 가장 어둡고 지친 버전의 히어로를 선택했죠. 제 경험상 이런 배우들이 장기적으로 더 오래 살아남는 것 같습니다. 최근 「오디세이」(2025)에서도 앤 해서웨이 다음으로 박수치고 싶은 연기를 보여줬는데, 이젠 완전히 연기파 배우로 자리 잡았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톰 홀랜드 이야기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톰 홀랜드보다 이 영화에서의 톰 홀랜드가 더 좋았습니다. '살기 싫어 죽겠다'는 듯한 그 지긋지긋하고 무거운 눈빛, 분노를 참다 참다 터지는 순간의 감정선이 정말 설득력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스파이더맨 없이도 충분히 먹고살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영화계에서 배우의 연기력을 평가하는 기준 중 하나로 캐릭터 레인지(Character Range)가 있습니다. 이는 한 배우가 소화할 수 있는 캐릭터의 폭과 깊이를 의미합니다. 이 영화는 출연진 전원이 기존 이미지와 정반대의 캐릭터를 연기함으로써, 각자의 캐릭터 레인지가 얼마나 넓은지 동시에 증명한 드문 사례입니다. 다들 연기를 너무 잘해서 보고 나면 이상한 찝찝함이 한동안 가시지 않는 기분, 제가 두 번 경험했습니다.
종교적 메시지 — 신앙이 사람을 망가뜨리는 건지, 망가진 사람이 신앙을 찾는 건지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가장 오래 머릿속에 남은 질문이 이겁니다. 종교가 사람을 무지하게 만드는 건지, 아니면 이미 무지한 사람이 종교에 빠지는 건지. 이 영화는 그 답을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심 깊은 인물일수록 더 큰 비극을 맞이하고, 그 주변인이 더 큰 상처를 안고 살아남는 구조를 반복합니다.
다 보고 나서 제가 가장 불쌍했던 건 주인공 아비도, 타락한 목사도 아니었습니다. 조부모였습니다. 아들 부부에 이어 손자·의붓손녀 세대까지 성실하고 신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치고 복이 없어도 너무 없습니다. 이 영화는 그 구도를 의도적으로 반복함으로써, 선의가 반드시 선한 결과를 낳지 않는다는 것을 냉정하게 보여줍니다.
이 영화의 내러티브 구조는 다크 프로비던스(Dark Providence)라는 개념과 닿아 있습니다. 다크 프로비던스란 신의 섭리나 선한 의도가 오히려 파국을 불러오는 아이러니한 서사 패턴을 말합니다. 미국 남부 고딕 문학의 전통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 개념은, 플래너리 오코너(Flannery O'Connor) 같은 작가들이 즐겨 다룬 주제입니다(출처: Britannica — Southern Gothic). 이 영화도 그 계보에 있다고 보면, 왜 이렇게 모든 인물이 신앙과 폭력 사이에서 파멸하는지 구조적으로 이해됩니다.
개인적으로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을 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도라이처럼 보이는 인물들이 사실은 각자의 논리 안에서 움직이고 있고, 그 논리들이 충돌할 때 폭력이 불가피하게 발생합니다. 영화 내러티브 이론에서 이를 결정론적 플롯(Deterministic Plot)이라고 합니다. 처음부터 결말이 정해진 것처럼 인물들이 서로를 향해 수렴해 가는 구조인데, 이 영화는 그 수렴의 끝에 '정의'가 아닌 '허탈감'을 놓습니다. 보고 나서 속 시원하면서도 기분이 더러운 그 이중적인 감각이 바로 여기서 나옵니다. 이런 심리적 반응은 도덕적 혐오(Moral Disgust) 반응이라고도 불리는데, 관객이 옳다고 느끼는 행동과 보고 싶지 않은 행동이 동시에 일어날 때 발생하는 인지 부조화 반응입니다(출처: APA — Disgust and Moral Psychology).
자주 묻는 질문
Q.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어디서 볼 수 있나요?
A.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로, 넷플릭스 구독자라면 바로 시청 가능합니다. 2020년 공개 이후 지금도 넷플릭스에서 서비스 중입니다. 단, 서비스 국가나 상황에 따라 변동될 수 있으니 넷플릭스 앱에서 직접 검색해보시길 권합니다.
Q. 영화 전개가 느리다는데 배속으로 봐도 괜찮나요?
A. 전개가 확실히 느린 편입니다. 제가 봤을 때 1.25배속 정도면 몰입이 깨지지 않으면서도 지루함을 줄일 수 있었습니다. 다만 배우들의 표정 연기와 침묵 연기가 이 영화의 핵심이기 때문에, 너무 빠르게 돌리면 그 감정선을 놓칩니다. 1.5배속 이상은 비추합니다.
Q. 로버트 패틴슨이 이 영화 말고 연기 잘한 영화가 또 있나요?
A. 제가 인상 깊게 본 작품은 「더 라이트하우스」(2019)와 「더 배트맨」(2022)입니다. 특히 「더 라이트하우스」는 흑백 화면에 대사와 분위기만으로 관객을 압도하는데, 패틴슨의 연기 폭이 얼마나 넓은지 확인하기 좋습니다. 최근 「오디세이」(2025)에서도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Q. 이 영화 원작이 있나요?
A. 네, 도널드 레이 폴록(Donald Ray Pollock)의 동명 소설이 원작입니다. 2011년 출판된 작품으로 미국 애팔래치아 지역의 어두운 현실을 배경으로 한 남부 고딕 문학의 대표작으로 꼽힙니다. 영화에서 내레이션을 맡은 목소리가 바로 원작 작가 폴록 본인입니다.
결론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좋은 영화'냐고 물으면 선뜻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보고 나서 기분이 좋아지는 영화는 분명 아닙니다. 녹터널 애니멀스와 함께 보고 나서 기분이 가장 더러웠던 영화로 꼽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수작이냐고 물으면 틀림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배우들의 연기, 촘촘한 서사 구조, 쉽게 잊히지 않는 여운까지, 공들여 만든 티가 납니다.
로버트 패틴슨을 트와일라잇 이미지로만 기억하고 있다면, 이 영화가 인식을 바꿔줄 겁니다. 톰 홀랜드를 스파이더맨으로만 알고 있다면, 이 영화에서 전혀 다른 면을 보게 됩니다. 불편함을 감수하고도 끝까지 볼 수 있는 분이라면, 충분히 시간을 쓸 만한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