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단순한 공포 영화를 기대했는데, 극장을 나오면서 머릿속이 한동안 멈춰 있었습니다. A24가 20살 감독 케인 파슨스에게 《백룸》 연출을 맡겼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화제였지만, 제가 직접 보고 나니 그 선택이 왜 맞았는지 납득이 됐습니다. 공간이 주인공인 영화라는 게 이런 것이구나, 싶었습니다.
16살 소년의 영상 한 편이 A24 영화가 되기까지
2019년, 인터넷 커뮤니티 포챈(4chan)에 사진 한 장이 올라왔습니다. 텅 빈 노란 카펫 방, 형광등이 희미하게 윙거리는 그 사진에는 짧은 설명이 달려 있었습니다. "만약 현실의 벽을 잘못 통과해 버리면, 넌 거기 떨어지게 될 거야." 그게 백룸 도시 괴담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이미지에 꽂힌 16살 소년 케인 파슨스는 직접 블렌더(3D 소프트웨어)로 백룸을 구현했습니다. 여기서 블렌더란 무료 오픈소스 3D 그래픽 도구로, 전문 스튜디오 장비 없이도 공간을 정밀하게 시각화할 수 있는 프로그램입니다. 그가 만든 9분짜리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 영상, 즉 마치 실제로 촬영된 것처럼 꾸민 영상 형식으로 구현한 작품은 현재 조회수 7,880만 회를 돌파했습니다(출처: YouTube, 케인 파슨스 오리지널 백룸 영상).
이후 파슨스는 백룸 웹시리즈로 서사를 확장했고, 결국 A24의 최연소 감독으로 장편 영화를 완성했습니다. 제가 알기로 A24는 《미나리》,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등을 배출한 독립 영화계의 검증된 배급사입니다. 그 A24가 20살 감독에게 베팅했다는 점 자체가 이 작품의 성격을 말해줍니다.
공간 자체가 공포인 이유 — 리미널 스페이스 미학
제가 직접 보면서 가장 놀란 건 세트 자체였습니다. 제작진은 사운드 스테이지(sound stage), 즉 영화 스튜디오의 대형 실내 촬영 공간 네 개를 합쳐 2,740㎡ 규모의 실제 백룸을 지었습니다. 실제 도면 없이는 길을 잃을 만한 크기입니다. 화면 속 배우들이 느끼는 미로감이 연기가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가 자주 쓰는 광각 렌즈(wide-angle lens) 샷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광각 렌즈란 일반 시야보다 넓은 범위를 담으면서 사물의 원근감을 과장하는 렌즈입니다. 낮은 위치에서 찍은 이 샷들 덕분에 공간이 실제보다 훨씬 길고 높게 느껴졌고, 인간이 그 공간에 눌리는 느낌이 화면 내내 유지됐습니다.
여기서 핵심 개념이 하나 나옵니다. 리미널 스페이스(liminal space)입니다. 리미널 스페이스란 원래 사람이 있어야 할 공간임에도 아무도 없는 상태, 즉 존재해야 할 무언가가 빠져 있는 공간을 가리킵니다. 인간의 뇌는 이런 공간을 마주하면 뭔가 잘못됐다는 신호를 보낸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심리학적으로 이 상태는 비현실감(derealization)과 연결되는데, 비현실감이란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실제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증상입니다. 백룸은 이 감각을 극한까지 밀어붙입니다.
VHS 카메라 특유의 지직거리는 화질, 형광등의 단조로운 윙 소음, 빈티지 신시사이저 기반의 사운드트랙까지. 제 경우엔 음악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했습니다. 뭔가 익숙한데 낯설고, 조용한데 불안한 그 감각이 상영 내내 끊기지 않았습니다.
- 2,740㎡ 규모의 실제 세트: 실존감과 물리적 미로감 동시 구현
- 광각 렌즈 저위치 촬영: 공간이 인간을 압도하는 시각적 효과
- VHS 화질 + 형광등 소음 + 신시사이저 OST: 감각 총합으로 만들어지는 불안감
- 리미널 스페이스 개념의 정확한 영상화: 빈 공간이 주는 뇌의 이상 감지 반응
백룸은 괴물 영화가 아니라 트라우마의 건축화다
백룸을 해석하는 방식은 여러 갈래가 있겠지만, 제가 보고 나서 가장 강하게 남은 건 이겁니다. 이 영화, 결국 트라우마(trauma)를 공간으로 지어놓은 심리극입니다. 트라우마란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적 경험이 심리에 장기적으로 남긴 상처를 뜻합니다.
주인공 클라크는 아내와 헤어진 뒤 가구매장 지하에서 잠을 자며 상담사 메리에게 심리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그 클라크가 백룸을 발견하고 메리에게 설명하면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개를 본 적 없는 사람에게 개를 설명하는 것 같다"고요. 제가 직접 보면서 이 대사에서 멈췄습니다. 상담이라는 행위 자체를 꿰뚫는 말이거든요. 상담사는 끝내 당사자의 내면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듣고 유추할 뿐입니다.
영화 중반부에 메리의 트라우마 속 공간인 옛 집이 점점 백룸화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게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 의도적인 연출이었습니다. 백룸이 클라크만의 공간이 아니라, 각자의 심리적 상처가 현실로 흘러넘친 공간이라는 해석을 뒷받침합니다. 또 백룸 안에 가구가 유독 많다는 점도, 클라크의 실패한 가구매장과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건 제 개인적인 독해입니다만, 단순한 우연으로 보기엔 설정이 너무 촘촘합니다.
한 가지 아쉬운 건, 중반 이후 전개가 다소 건너뛰는 느낌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초반부에 쌓아온 분위기가 후반부까지 완전히 이어졌다면 훨씬 더 강렬했을 텐데 싶었습니다. 다만 영화가 설명을 의도적으로 생략한다는 걸 알고 보면 납득이 됩니다. 심리 장애 중 이인증(depersonalization)이라는 개념이 있는데, 이인증이란 자신의 행동이나 감정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한다는 느낌, 즉 자아와 현실이 분리되는 경험을 뜻합니다. 백룸 안에서 클라크가 겪는 현실감 붕괴가 바로 이 상태와 맞닿아 있습니다(출처: 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 해리성 장애 개요). 설명이 부족할수록 더 무서운 건, 관객이 직접 그 이인 상태를 경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백룸 영화 보기 전에 유튜브 원작 영상 꼭 봐야 하나요?
A. 안 보고도 이해는 됩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봐보니, 원작 영상을 먼저 보면 영화 속 공간 묘사가 얼마나 정교하게 재현됐는지 비교하는 재미가 확실히 더 있습니다. 9분짜리이니 부담도 없고, 가능하면 미리 보고 가시길 권합니다.
Q. 이 영화 무서운 편인가요? 귀신 갑툭튀 같은 게 많이 나오나요?
A. 갑자기 튀어나오는 점프 스케어는 최대한 억제하는 방식입니다. 대신 어두운 방 안에서 서서히 등장하는 존재, 공간 자체가 주는 압박감으로 공포를 만듭니다. 분위기로 서서히 조여오는 타입이라, 심장 약한 분들도 비교적 견딜 만합니다.
Q. 백룸 원래 팬이면 더 재밌게 볼 수 있나요?
A. 기존 팬이라면 오히려 호불호가 갈릴 수 있습니다. 영화는 백룸의 세계관을 그대로 펼치기보다 심리극 방향으로 해석합니다. 파슨스 웹시리즈의 액션감 있는 전개를 기대하면 다소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 접근이 신선했지만, 팬층이 원하던 방향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Q. 결말이 열린 결말인가요? 해석이 필요한 영화인가요?
A. 네, 의도적으로 설명을 생략하는 방식입니다. 처음엔 답답할 수 있는데, 제 경험상 오히려 그 여백 덕에 극장을 나온 후에도 한참 생각하게 됩니다. 클라크와 메리의 트라우마를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영화입니다.
결론
매번 뻔한 구성의 공포 영화를 보다가 이걸 보니 확실히 달랐습니다. 공간이 이렇게 강력한 공포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걸 다시 실감했고, 미스터리를 미스터리로 남겨두는 선택이 오히려 여운을 더 진하게 만든다는 것도요. 누가 보러 가자고 하면 한두 번은 더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케인 파슨스는 이제 겨우 20살입니다. 이 영화가 그의 시작점이라는 게 솔직히 좀 무섭습니다. 다음 작품이 어떤 방향으로 갈지, A24가 이 감독과 어떤 프랜차이즈를 만들어갈지 기대가 됩니다. 아직 극장에 걸려 있다면, 한 번쯤 어두운 방에서 직접 확인해 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