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액션 영화라고 해서 틀었는데 절반 넘도록 로맨스가 나오면 배신감을 느끼는 분들 계실 겁니다. 저도 딱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애플TV 오리지널 시리즈 <더 캐니언>은 "액션에 로맨스를 얹은 영화"라는 일반적인 소개와 달리, 직접 보고 나니 오히려 로맨스가 뼈대고 액션이 살점인 구조였습니다. 그 차이가 꽤 컸습니다. 신경써서 만든 티가 납니다.
로맨스가 먼저다 — 장르 구조를 잘못 알고 봤습니다
일반적으로 액션 영화에 로맨스가 들어간다고 하면, 총격전 사이사이에 키스 신 한두 번 끼워 넣는 구조를 생각하게 됩니다. 저도 그렇게 알고 <더 캐니언>을 틀었는데, 실제로는 전혀 달랐습니다. 중반부를 훌쩍 넘기도록 두 주인공 드라사와 리바이의 썸이 메인 서사를 끌고 갑니다.
두 사람은 협곡을 사이에 두고 각자의 초소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군인입니다. 75년간 비밀리에 관리돼 온 군사 지역이라는 설정 자체가 이미 긴장감을 깔아놓는데, 그 위에 서로 한 번도 직접 만난 적 없는 두 남녀의 감정선이 얹힙니다. 리바이는 체스를 수상할 정도로 잘 두고, 드라사는 드럼 실력이 이상하리만큼 뛰어납니다. 이 디테일들이 두 인물을 입체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장치, 즉 캐릭터 레이어링(character layering) 역할을 합니다. 여기서 캐릭터 레이어링이란 인물의 직업이나 역할 외에 개인적인 특기·취향을 덧입혀 인물을 더 실감 나게 느끼도록 만드는 연출 기법을 말합니다.
70년 넘게 이어져온 금기, 협곡을 건너는 것을 리바이가 깨는 장면에서 저는 솔직히 웃음이 나왔습니다. 목숨을 걸고 죽음의 협곡을 건너는 이유가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서라는 게 황당하면서도 납득이 됐습니다. 그만큼 두 사람의 감정이 충분히 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이 일반적인 액션 영화와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이었습니다.
그리고 리바이가 협곡을 돌아가다 추락하는 순간, 드라사가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몸을 던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이 바로 이 부분이었습니다. 지금껏 본 영화 중 가장 직관적으로 "이 사람이 저 사람을 사랑하는구나"가 전달된 장면이었습니다. 대사 한 마디 없이요.
- 드라사: 러시아 대통령 저격 임무를 수행한 엘리트 스나이퍼, 협곡 감시 임무 중 할로우맨과 조우
- 리바이: 협곡 건너편 초소를 지키는 군인, 체스 실력으로 드라사의 마음을 얻음
- 할로우맨(Hollow Man): 인간과 나무가 융합된 괴생명체로, 1940년대 군복을 착용한 채 발견됨
- 협곡: 75년간 비밀리에 군이 관리해온 공간으로, 생사의 경계에 갇힌 존재들이 존재하는 이상 지역
세계관과 안야 테일러-조이 — 잘 만든 티가 납니다
일반적으로 킬링타임용 영화라고 하면 세계관이 얕거나, 연출이 허술하거나, 둘 중 하나가 빠진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킬링타임용치고 너무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시에 "그렇다고 명작이라고 부르기엔 아쉬운 게 있다"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습니다. 이 두 감정이 함께 남는 영화는 사실 흔하지 않습니다.
연출을 맡은 스콧 데릭슨 감독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 작품인 <닥터 스트레인지>로 잘 알려진 감독입니다. MCU란 마블 스튜디오가 구축한 공유 영화 세계관(Marvel Cinematic Universe)을 뜻하며, 스콧 데릭슨은 이 세계관 안에서 초자연적이고 시각적으로 독창적인 연출로 호평받은 바 있습니다. 그 감각이 <더 캐니언>에도 고스란히 살아있었습니다. 제가 봤을 때 협곡 안 마을이 폐허로 변한 장면과 거미 떼가 성당을 채우는 장면은 단순히 공포 연출이 아니라, 이 세계가 얼마나 오래된 비밀을 품고 있는지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세계관 자체도 흥미롭습니다. 감독이 <레지던트 이블> 게임 시리즈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게 아트워크를 보면 바로 느껴집니다. 바이오하자드(Biohazard) 특유의 썩어가는 유기체적 공포감이 화면 곳곳에 깔려 있었습니다. 바이오하자드란 생물학적 위험 물질 또는 그것이 초래하는 재앙적 상황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게임에서는 변이 된 생명체들이 폐쇄 공간을 점령하는 방식으로 공포를 구현합니다. 이 영화의 협곡도 정확히 그 구조입니다.
안야 테일러-조이는 <위플래시>와 <탑건: 매버릭>에서 눈도장을 찍어 둔 배우였는데, 이 영화에서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단순히 외모의 문제가 아니라, 극딜을 넣고 막타를 날리는 장면에서 감정 소모 없이 냉정하게 움직이는 연기가 스나이퍼라는 캐릭터와 정확히 맞아떨어졌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안야 테일러-조이의 필모그래피를 다시 찾아봤을 정도입니다. 참고로 애플 TV+ 오리지널 콘텐츠의 제작 방향성과 수상 이력은 출처: Apple TV+ 공식 오리지널 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제 경험상 이 영화에서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분량입니다. 협곡이 숨기고 있는 비밀, 군이 75년간 이 공간을 관리해 온 이유, 할로우맨이 생겨난 원인이 엔딩까지 끝내 완전히 밝혀지지 않습니다. 드라마 시리즈로 나왔다면 이 세계관을 훨씬 풍부하게 펼쳐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내내 들었습니다. 영화 포맷의 한계가 오히려 이 작품에겐 아쉬움으로 작용한 케이스입니다. 스콧 데릭슨 감독의 연출 이력은 출처: IMDb 스콧 데릭슨 프로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더 캐니언 어디서 볼 수 있나요?
A. 애플TV+ 오리지널 시리즈로, 애플TV 앱에서 시청 가능합니다. 안드로이드 기기용 애플TV 앱에서도 시청할 수 있으며, 애플TV+ 구독이 필요합니다. 제가 직접 확인했을 때 한국어 자막도 지원됩니다.
Q. 더 캐니언 액션 영화인가요, 로맨스 영화인가요?
A. 일반적으로 액션 영화로 소개되는 경우가 많은데, 제가 직접 보니 로맨스가 서사의 중심이고 액션은 후반부에 집중된 구조였습니다. SF 장르형 로맨스 액션으로 보는 게 정확합니다. 공포·서스펜스 요소도 혼재되어 있습니다.
Q. 할로우맨이 뭔가요? 설정이 어떻게 되나요?
A. 할로우맨은 인간과 나무가 융합된 괴생명체로, 1940년대 군복을 착용한 채 협곡 안에서 발견됩니다. 영화 내에서 이들은 삶과 죽음 사이에 갇혀 있는 존재로 묘사되며, 정확한 발생 원인은 영화에서 끝까지 완전히 밝혀지지 않습니다. 이 미완의 설정이 아쉬우면서도 속편에 대한 기대를 남깁니다.
Q. 안야 테일러-조이 나오는 다른 영화도 비슷한 분위기인가요?
A. 비슷한 분위기의 작품을 찾는다면 <더 메뉴>나 넷플릭스 시리즈 <퀸스 갬빗>을 추천합니다. 다만 <더 캐니언>처럼 로맨스와 SF 액션을 동시에 담은 작품은 그녀 필모그래피에서 독보적인 편입니다. 제 경험상 이 영화에서 그녀의 매력이 가장 직선적으로 드러납니다.
결론
정리하면, <더 캐니언>은 킬링타임용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공들여 만들었고, 명작이라고 부르기엔 세계관 설명이 아쉬운 작품입니다. 그런데 이 어중간한 위치가 오히려 영화의 매력이기도 합니다. 로맨스가 과하지도 않고, 액션이 잔인하게 튀지도 않으면서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합니다. 이 균형을 잡는 게 사실 가장 어려운 일인데, 스콧 데릭슨 감독은 그걸 해냈습니다.
보고 나서 절대 후회할 영화는 아닙니다. 어느새 끝나 있는 유형의 영화입니다. 애플TV+에서 풀 버전을 직접 확인해 보시길 권합니다. 협곡이 숨기고 있는 군의 비밀, 끝까지 보셔야 그 찜찜함의 정체를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