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6,000달러짜리 좀비 영화가 존재한다는 걸 몰랐습니다. 2012년 텔루라이드 호러쇼에서 처음 공개된 뒤 이듬해 VOD로 풀린 《더 배터리(The Battery)》, 예고편만 보고 꽤 기대를 품었는데 막상 다 보고 나서 제가 처음 든 감정은 "배신감"에 가까웠습니다. 그 이유를 차근차근 풀어보겠습니다.
줄거리 — 목적지 없이 걷는 두 남자
무대는 좀비 아포칼립스(zombie apocalypse) 이후의 코네티컷 뉴잉글랜드 시골입니다. 여기서 좀비 아포칼립스란 사회 기반이 완전히 붕괴된 상태에서 좀비가 대다수를 차지하게 된 세계관을 뜻합니다. 쉽게 말해 생존자가 손에 꼽히는 세상이죠.
그 폐허를 떠도는 건 포수 벤과 투수 미키, 한때 같은 야구팀 동료였던 두 사람입니다. 제목 《더 배터리》는 야구 용어 배터리(battery)에서 왔습니다. 배터리란 투수와 포수를 한 쌍으로 묶어 부르는 야구 전문 용어로, 여기에 '소모되는 건전지'라는 이중 의미까지 담겨 있습니다. 인간의 허무한 소진을 함께 암시하는 셈이죠.
두 사람의 생존 방식은 극과 극입니다. 벤은 매 순간 좀비를 직접 처리하고, 오두막이든 모텔이든 안전을 확인한 뒤에야 짐을 풉니다. 반면 미키는 헤드폰을 끼고 음악 속으로 숨어들며 좀비 한 마리도 스스로 죽여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보다가 실제로 책상을 탁 쳤던 장면이 바로 이 부분이었습니다. 저라면 절대 미키 같은 사람과 팀을 유지하지 않았을 것 같거든요.
두 사람이 차를 얻고 어느 여자의 집을 들렀다가 무전기로 '과수원' 생존자 집단의 교신을 엿듣는 장면까지가 영화 전반부의 핵심 흐름입니다. 무전기 속 여자 애니의 목소리에 미키는 금세 빠져들고, 그게 후반부 파국의 씨앗이 됩니다.
- 제작연도: 2012년, 텔루라이드 호러쇼 초연 / 2013년 VOD 공개
- 제작비: 약 6,000달러, 코네티컷에서 보름 만에 촬영
- 감독·각본·주연(벤 역): 제레미 가드너 / 미키 역: 애덤 크로나임(공동 제작자)
- 배경: 좀비 아포칼립스 이후의 뉴잉글랜드 시골지대
미키 — 이 캐릭터 때문에 영화가 더 힘들었습니다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건 미키라는 인물이었습니다. 주변에 정말 미키 같은 사람이 있다면 저는 그냥 멀리할 것 같습니다. 솔직히 그 판단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미키는 가족을 잃고도 방망이를 들지 못합니다. 좀비가 차창에 달라붙는 위기 상황에서 그가 선택한 건 바지를 벗는 것이었고, 결국 벤이 낚시를 마치고 돌아와 뒷수습을 합니다. 생존(survival)의 관점에서 생존이란 위협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며 살아남는 행위인데, 미키는 그 기본조차 포기한 인물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감독 제레미 가드너는 미키를 악인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롱테이크(long take) 기법으로 두 사람의 침묵과 대화를 길게 담아냅니다. 롱테이크란 편집 없이 카메라를 오래 돌려 장면을 하나의 긴 흐름으로 보여주는 촬영 기법으로, 여기선 두 남자 사이의 어색함과 온도 차를 날것 그대로 전달합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느낀 건, 이 기법이 미키의 답답함을 더 증폭시킨다는 점이었습니다.
미키가 무전기로 애니에게 집착하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몇 달 만에 들은 낯선 사람의 목소리에 저렇게까지 무너지나 싶다가도, 가만 생각해 보면 그게 인간의 본능적인 사회성(sociality)이라는 걸 부정하기 어렵더군요. 사회성이란 인간이 타인과 연결되려는 근본적인 욕구를 가리키는데, 극한 상황일수록 그 욕구가 판단력을 앞선다는 점을 영화는 미키를 통해 보여줍니다. 납득은 가지만 공감은 못했습니다, 저는요.
결말 — 헤드폰을 쓰고 걸어가는 벤의 뒷모습
후반부는 차 안에 갇힌 채 좀비 떼에 포위되는 장면으로 채워집니다. 애니 일행이 떠나며 벤의 다리에 총을 쏘고 차 키를 수풀 속에 던져버린 뒤부터, 두 사람은 좁은 차 안에서 기약 없이 버팁니다. 인내심이 바닥나면서 오히려 둘은 술을 나눠 마시고 같이 노래를 부릅니다. 제 경험상 이런 극한 상황에서 유머나 노래가 나오는 장면은 보는 내내 이상하게 마음이 찌릿하더군요.
결국 키를 찾으러 차 밖으로 나간 미키는 좀비에게 물린 채 돌아옵니다. 감염(infection), 즉 좀비 바이러스에 물리면 결국 좀비화가 진행된다는 이 장르의 핵심 규칙이 두 사람 모두에게 현실로 닥칩니다. 벤은 끝내 총을 듭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벤이 챙긴 건 그토록 질색했던 미키의 헤드폰이었습니다. 좀비 떼를 등지고 헤드폰을 끼고 걷는 벤의 뒷모습, 저는 이 한 컷이 영화 전체를 요약한다고 생각합니다. 헤드폰은 단순한 소품이 아니라 미키가 남긴 유일한 유산이자, 벤이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차단하기 시작한다는 상징적 장치(symbolic device)입니다. 상징적 장치란 특정 사물이 인물의 심리 변화나 주제 의식을 대신 표현하는 서사적 도구를 말합니다.
다만 제가 끝끝내 아쉬웠던 건, 애니와 과수원 집단에 대한 이야기가 완전히 열린 채로 끝난다는 점입니다. 그쪽 서사의 마무리가 전혀 없어서 마치 중간에 페이지가 찢겨나간 소설을 읽은 기분이었습니다. 예술적 여백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제 기준에선 그냥 미완성에 가까웠습니다. 인디 영화(indie film) 특유의 절제미를 살린 연출이라는 평가도 있는데, 솔직히 저에겐 그 절제가 '재미의 포기'처럼 느껴졌습니다.
참고로 저예산 독립영화의 예술성 기준과 상업적 재미의 관계에 대해서는 출처: IMDb - The Battery(2012)에서 관객 평점과 리뷰를 직접 확인해 보실 수 있고, 인디 호러 장르 전반의 트렌드는 출처: Rotten Tomatoes - The Battery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더 배터리 제목이 무슨 뜻인가요?
A. 야구에서 투수와 포수를 한 쌍으로 묶어 부르는 전문 용어 '배터리(battery)'에서 왔습니다. 동시에 건전지처럼 소모되고 닳아가는 인간의 삶을 암시하는 이중적 의미도 담겨 있어서, 제가 보기엔 이 제목이 영화에서 가장 잘 만든 부분 중 하나입니다.
Q. 더 배터리 제작비가 진짜 6,000달러예요?
A. 맞습니다. 감독 겸 주연 제레미 가드너가 공동 제작자 애덤 크로나임과 함께 코네티컷에서 보름 만에 촬영해 완성했습니다. 제가 그 사실을 알고 나서 다시 봤더니 촬영의 거친 질감이 오히려 세계관과 잘 맞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재미가 없는 건 어쩔 수 없었고요.
Q. 더 배터리 결말이 열린 결말인가요?
A. 네, 전형적인 열린 결말입니다. 미키를 잃은 벤이 헤드폰을 쓰고 걸어가는 장면에서 영화가 끝나고, 애니와 과수원 집단의 이후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예술적 여백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저는 직접 보고 나서 서사의 미완성에 가깝다고 느꼈습니다.
Q. 더 배터리 어디서 볼 수 있나요?
A. 2013년 VOD로 공개됐고, 현재는 각종 스트리밍 플랫폼 및 온라인 대여 서비스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정확한 제공 플랫폼은 시기마다 달라지니 검색으로 확인하는 게 빠릅니다. 화끈한 액션을 기대하고 보면 느리게 느껴질 수 있으니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보시길 권합니다.
결론
《더 배터리》는 분명 예술성이 높은 인디 영화입니다. 6,000달러라는 극단적인 저예산에서 롱테이크와 상징적 장치를 활용해 두 남자의 관계를 섬세하게 그려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마지막 헤드폰 장면은 제가 본 좀비 영화 결말 중 가장 오래 머릿속에 남은 이미지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제 기준에서 영화는 기본적으로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대와 의상과 춤은 갖췄는데 막상 노래를 시작하니 음치였던 가수, 그 무대를 본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과수원 서사는 미완으로 끝났고, 차 안 장면은 너무 반복됐습니다. 조용하고 인간적인 좀비 영화를 원하는 분께는 권할 수 있지만, 저는 두 번 볼 자신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