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저는 키아누 리브스가 코미디 연기를 이렇게 잘할 줄 몰랐습니다. 매트릭스의 네오, 존 윅, 콘스탄틴까지 항상 진지한 역할만 맡아온 배우라는 선입견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영화 굿 포츈을 보고 나서 그 생각이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날개 달린 키아누 리브스가 천사 흉내를 내는 장면만으로도 이미 본전을 뽑은 기분이었습니다.
존 윅이 날개를 달면 생기는 일
일반적으로 키아누 리브스라고 하면 무표정에 과묵한 액션 히어로 이미지가 강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예전에 넷플릭스 영화 '우리 사이 어쩌면'에서 그가 카메오로 등장하는 장면을 봤는데, 존 윅 그 모습 그대로 나와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능청스럽게 웃기는 연기를 하더라고요. 그때 처음으로 '이 사람 코미디 감각이 있구나'라는 걸 느꼈습니다.
굿 포츈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천사 가브리엘(Gabriel)입니다. 가브리엘이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대표적인 대천사(大天使, Archangel)로, 신의 메시지를 인간에게 전달하는 역할로 알려진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가브리엘의 보직은 '운전 중 문자 담당 천사'입니다. 천사 조직 안에서도 가장 현대적이고 소박한 자리인 셈이죠. 처음 이 설정을 들었을 때 피식 웃음이 나왔습니다.
분장도 거의 없이 그냥 키아누 리브스 얼굴에 작은 날개만 달려 나오는데, 이게 묘하게 더 웃깁니다. 존 윅이 날개 달고 천사라고 하고 있으니 위화감이 그대로 개그가 되는 구조입니다. 저는 보면서 자꾸 존 윅 세계관이랑 연결되는 후속작처럼 느껴졌습니다. 콘스탄틴에서 악마를 그렇게 쳐잡더니 결국 천사로 승진한 거 아닌가 하는 소소한 재미도 있었고요. 심지어 어떤 각도에서는 예수님처럼 보이기도 해서 혼자 피식했습니다.
허당 연기의 기술, 그리고 영화의 진짜 구조
허당 연기(slapstick comedy)란 캐릭터가 의도치 않게 실수를 반복하거나 상황을 오히려 악화시키면서 웃음을 유발하는 코미디 기법입니다. 굿 포츈에서 키아누 리브스의 가브리엘이 딱 이 유형입니다. 주인공 아지(Aji)의 인생을 구원하겠다고 나서서는 오히려 더 깊은 나락으로 밀어 넣고, 미래를 보여줬더니 절망의 연속이고, 결국 인생을 통째로 바꿔버리는 대형 사고를 치고 맙니다.
이 영화의 또 다른 축은 아지와 제프의 바디 스왑(body swap)입니다. 바디 스왑이란 두 인물의 삶이나 처지가 뒤바뀌는 서사 장치로, 할리우드 코미디에서 자주 쓰이는 플롯 장치입니다. 하루하루 알바 여러 개를 뛰며 차 안에서 쪽잠을 자는 아지와, 아무것도 안 해도 거대한 저택에서 살아가는 제프의 삶이 완전히 뒤바뀝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보면서 느낀 건, 이 설정이 사실 현실에서는 성립이 좀 어렵다는 점입니다.
만약 제프가 자수성가한 인물이라면, 그 삶을 아지가 이어받는다 해도 결국 어느 시점에서 사업을 말아먹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대로 아지가 제프의 인생을 물려받는다고 해도, 그 업무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는 빚쟁이가 될 공산이 큽니다. 영화는 이 지점을 가볍게 넘겨버리는데, 저는 그게 조금 아쉬웠습니다. 코미디 영화니까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요.
주연이자 각본과 감독까지 맡은 아지 안사리(Aziz Ansari)의 멀티롤(multi-role)도 눈길을 끕니다. 멀티롤이란 한 사람이 창작 과정에서 배우·작가·연출가 등 여러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이런 구조는 코미디 영화에서 작가 본인의 시각이 가장 직접적으로 반영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미국 코미디 배우이자 작가인 안사리는 '마스터 오브 노원(Master of None)' 시리즈로 에미상을 수상한 이력이 있는데, 그 감각이 이 영화에도 녹아 있습니다.
제가 느끼기에 키아누 리브스의 이번 역할은 그의 실제 이미지에 가장 가까운 캐릭터입니다. 실제로 키아누 리브스는 노숙자와 거리낌 없이 대화를 나누고 지하철 바닥에 앉아 있는 모습이 포착되는 등 소탈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출처: IMDb 키아누 리브스 프로필) 악역을 하든 천사를 하든 위화감이 없는 배우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코미디 영화로서 굿 포츈, 어떤 사람에게 맞는가
굿 포츈을 보기 전에 저는 키아누 리브스와 세스 로건(Seth Rogen)의 조합이 잘 어울릴지 반신반의했습니다. 세스 로건 특유의 과장된 코미디와 키아누의 조용한 존재감이 맞을까 싶었거든요. 그런데 실제로 보니 오히려 그 온도 차이 자체가 웃음 포인트였습니다. 키아누의 덤덤한 표정과 황당한 상황의 조합은 예상보다 훨씬 잘 맞았습니다.
미국 코미디 영화의 장르 관습(genre convention)이란 특정 장르가 오랫동안 반복되면서 관객이 자연스럽게 기대하게 된 서사 패턴이나 캐릭터 유형을 뜻합니다. 굿 포츈은 이 관습을 충실히 따르는 영화입니다. 복잡한 반전도 없고, 예상 밖의 전개도 없습니다. 그래서 좋은 사람도 있고, 그래서 아쉬운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설정은 꽤 참신한데 스토리 자체는 다소 평범하게 흘러가더라고요.
그렇다면 이 영화가 맞는 관객은 어떤 유형일까요. 제 경험상 아래 조건에 해당할수록 만족도가 높을 것 같습니다.
- 키아누 리브스의 기존 필모그래피(존 윅, 콘스탄틴, 매트릭스)를 알고 있는 관객 — 그의 이미지와 이번 캐릭터의 온도 차이가 클수록 더 웃깁니다.
- 복잡한 플롯 없이 가볍게 웃고 싶은 날 틀어놓기 좋은 영화를 찾는 분 — 생각 없이 볼 수 있는 편안한 코미디입니다.
- 미국식 블랙 코미디보다 따뜻한 결말이 있는 코미디를 선호하는 분 — 이 영화는 끝이 훈훈합니다.
- 날개 달린 귀여운 천사 캐릭터를 좋아하는 분 — 날개가 소박하게 작아서 앙증맞습니다.
미국 영화 산업에서 코미디 영화의 박스오피스 성과는 최근 몇 년간 OTT 플랫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는 분석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출처: Variety) 굿 포츈 역시 극장보다는 스트리밍 환경에 더 잘 맞는 영화처럼 느껴졌습니다. 집에서 부담 없이 틀어놓기에 딱 좋은 스케일입니다.
정리하면 굿 포츈은 키아누 리브스의 필모를 알고 있을수록, 그리고 기대치를 높게 잡지 않을수록 더 즐길 수 있는 영화입니다. 스토리 자체의 완성도를 따지면 아쉬운 부분이 있고, 현실적 개연성도 살짝 느슨합니다. 하지만 콘스탄틴에서 악마를 잡던 사람이 날개 달고 운전 중 문자 사고나 막고 있다는 그 설정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볼 이유가 됩니다. 피곤한 날 저녁, 별생각 없이 틀어두기 좋은 영화를 찾고 있다면 한 번 추천드립니다.
---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eiX3q3Rsvko